
당구를 치다 보면 이상하게 유독 이기기 힘든 사람이 있습니다. 실력 차이가 크게 나는 것도 아닌데 만나기만 하면 자꾸 지는 사람. 한두 번 지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는데, 어느 순간부터 연패가 쌓이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. 저에게는 그런 동생이 한 명 있습니다. 평소에는 편하게 당구를 치는 동생인데, 어느 순간부터 묘한 라이벌 의식이 생겼습니다. 그리고 그 동생에게 오늘 경기 전까지 무려 10연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. 솔직히 말하면 자존심이 조금 상했습니다. '한두 번도 아니고 10연패를 했다고?' 그런데 더 웃긴 건, 그렇게 10번을 지면서도 다음에 또 만나면 이기고 싶어 진다는 것입니다. 그리고 오늘, 드디어 그 10연패를 끊었습니다. 그런데 오늘 경기는 제가 아주 잘 쳐서 이긴 경기가 아니었습니다.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.
오늘은 처음부터 당구가 잘 맞지 않았다
오늘 그 동생을 만나기 전부터 당구가 영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저는 다름 사람과 먼저 세 게임을 쳤는데 1승 2패를 했습니다. 그것보다 더 마음에 걸렸던 건 경기 내용이었습니다. 평소 같으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는 공들이 자꾸 빠졌습니다. 두께도 미세하게 어긋나고, 회전도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먹는 느낌이었습니다. 애버리지가 나올 만한 경기 자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. 공 하나를 치고 나면 '이게 왜 빠졌지?'라는 생각이 들고, 다음 공을 앞에 두고도 자신 있게 큐를 내밀기가 어려웠습니다. 그렇게 세 게임을 치고 나니 조금 치지기도 했습니다. '오늘은 그냥 당구가 안 되는 날인가 보다'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동생이 당구장에 들어왔습니다. 그리고 자연스럽게 한마디 하더군요. "형, 한 게임 치실래요?"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. 평소 같으면 아무 생각 없이 "그래" 하고 큐를 잡았을 겁니다. 그런데 오늘은 달랐습니다. 10연패 중이었으니까요. 이미 다른 사람에게 1승 2패를 하고 온 상황이었는데, 여기서 또 지면 그 동생에게 11연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. 머리로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묘한 오기가 올라왔습니다. '오늘은 지면 안 되는데'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큐를 결국 잡았습니다.
오늘은 잘 치는 것보다 안 무너지는 것이 중요했다
막상 게임을 시작하고 보니 상대도 평소와 달랐습니다. 평소에 잘 풀리지 않는 공도 어떻게든 해결하고, 어려운 배치에서도 득점을 만들어내던 동생인데 오늘은 그 동생도 공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. 서로 상황은 비슷했습니다. 공은 빠지고, 생각대로 되지 않고 좋은 기회가 와도 한 번씩 놓쳤습니다.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제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. 평소 같으면 어려운 공이 나오면 '어떻게든 득점해야 한다'는 생각부터 했을 겁니다.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. 내가 이 공을 득점 할 수 있을까? 그것만 생각하지 않고, 이 공을 실패했을 때 상대에게 어떤 공이 남을까? 를 생각했습니다. 득점 확률이 낮은 어려운 공이라면 억지로 공격하기보다는 다음 배치를 어렵게 만들어주는 쪽을 선택했습니다. 당구를 치다 보면 그런 날이 있습니다. 공이 잘 맞는 날에는 자신 있게 공격하면 됩니다. 하지만 오늘처럼 전체적으로 감각이 좋지 않은 날에는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한 번의 실수가 연속 실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. 그래서 오늘은 조금 다르게 경기 운영을 했습니다. 제가 잘 치는 당구보다 상대가 어렵게 치게 만드는 당구를 하자. 완벽한 득점은 아니더라도 내가 먼저 무너지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. 그렇게 한 점, 또 한 점을 만들어 갔습니다.
10연패를 끊는 순간,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
경기 내용만 놓고 보면 잘 친 게임은 아니었습니다. 애버리지가 아주 좋았던 것도 아니고, 화려한 연속 득점이 나온 것도 아니었습니다. 상대도 평소보다 잘 치지 못했습니다. 그렇게 서로 힘든 경기를 이어가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제가 한 점을 먼저 만들어냈습니다. 그리고 게임이 끝났습니다. 이긴 것이었습니다. 그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. '드디어 끝났다' 10연패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고, 참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기분이 묘했습니다. 오늘 한 게임 이겼다고 갑자기 실력이 크게 올라간 것도 아니고, 그 동생보다 당구를 잘 치게 된 것도 아닙니다. 그냥 한 게임 이겼을 뿐입니다. 그런데 그 한 게임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. 아마도 10번을 연속으로 졌던 기억 때문이겠죠. 당구는 항상 잘 쳐야 이기는 게 아닙니다. 오늘 게임을 끝내고 생각해 봤습니다. 만약 오늘 내가 평소처럼 공격적인 당구만 고집했다면 어땠을까를. 잘 맞지 않는 날인데 어려운 공을 계속 공격하고, 득점 욕심을 내다가 실패하고, 상대에게 좋은 득점 기회를 넘겨줬더라면 아마 오늘도 졌을지도 모릅니다. 오늘 제가 잘한 게 있다면 특별히 공을 잘 맞힌 것이 아니라 내 상태를 인정한 것이었습니다. '오늘은 잘 안 맞는다'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. 잘 안 맞는 날에 억지로 잘 치려고 하는 것보다, 그날의 컨디션에 맞게 경기 방법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. 당구를 오래 치다 보면 결국 이런 것도 실력의 일부가 아닐까 싶습니다. 잘 치는 날에는 누구나 자신 있게 칠 수 있습니다. 하지만 공이 마음대로 맞지 않는 날, 에버리지가 나오지 않는 날, 쉬운 공마저 자꾸 빠지는 날에도 어떻게든 경기를 끌고 가서 한 판을 가져오는 것. 어쩌면 그런 날의 승리가 더 값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.
그래도 라이벌은 라이벌이다
오늘 한 번 이겼다고 해서 이제부터 제가 계속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. 오히려 다음에 만나면 또 질 수도 있습니다. 오늘 경기가 워낙 서로 잘 안 맞는 날이었으니까요.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. 10연패는 이제 끝났습니다. 11연패를 당할 뻔한 상황에서 겨우 한 번 끊어냈습니다. 그리고 이상하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음 경기가 기다려집니다. 아마 이것이 라이벌이 있다는 재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. 그냥 친한 동생이었다면 한 판 지고 웃고 말았을 텐데, 라이벌이라는 생각이 생기니 한 판 한 판의 의미가 달라집니다. 오늘은 제가 이겼지만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. 그래서 다음에 그 동생이 당구장에 들어와서, "형, 한 게임 하실래요?"라고 말한다면 아마 저도 또 큐를 잡을 것 같습니다. 물론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요. '좋아, 이제 10연패 끝냈으니까 2연승 한번 가보자' 당구가 참 그렇습니다. 한 번 이기면 또 이기고 싶어 집니다. 그리고 그 마음 때문에 저는 또 당구장을 찾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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